내가 나로 잘 살려면
인류의 역사를 통해 문명이 시작된 것은 인간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이다. 거기서부터 내세, 해탈, 구원, 전생 등의 관념이 생겨났다. 이집트문명에서 또한 가부좌를수메르문명보다 앞서고 있다는 홍산문명에서 가부좌를 한 여신상의 발견 또한 동북아시아의 문명의 근원 또한 이러한 정신적 각성이 아닌가 추정된다. 서양 사상의 시초는 소크라테스이고 그는 "너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 삼았다. 한편 동양사상의 문을 연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인 부처는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서 부터 나온다는 사상을 열었다.
"나"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어릴때는 부모의 간섭때문에 커서는 끊임없는 가족과 사회적 압력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으로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목표나 이상을 따르려고 내 자신을 학대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힘들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잊고 사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이 불안이 더 외부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부추기거나 그 외부의 세계의 자극에 중독시키는 역할을 하게되기도 한다. 내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외부의 세계의 기준에 의해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사실상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이 변화는 실패할 수 없는 운명이고 내 안에서의 심리적 불안과 뒤틀림만을 야기하게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은 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다. 내 한계는 수많은 컴플랙스로 이루어져있고 이 컴플랙스를 알게 하는 것은 외부세계와의 마찰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나의 원수는 나의 스승인 것이다. 이 한계를 정확히 직시할때 쓸데없는 내 자신을 변하려하는 노력은 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는 노력의 상당부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인격적이 변화이다. 왜냐하면 어렸을때부터 우리의 심리는 상당한 부분들이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나를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 노력을 정지한다는 것이고 이 정지를 통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비축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자신을 본다는 것은 첫째 판단중지다. 내 자신에 대한 일체의 도덕적 판단 중지다. 이때 여분의 심리적 에너지가 생긴다. 둘째 이 에너지로 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다. 내 자신의 한계는 컴플랙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본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번째 단계는 이 한계에 대한 직시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지혜의 강도가 높아진다.
성공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가 없는 성공은 자기 학대일뿐이다. 내가 내 자신을 발견할때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실용적 지혜가 나온다. "나"라는 것은 그동안의 쌓아온 온갖경험들의 총체이다. 아무리 내가 공자 예수 부처를 이용해 성공하려고 날뛰어도 이 모든 것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가 "나"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래서 유다에게 너가 하고 것을 하라고 했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것이고 부처는 수많은 원인과 결과로 생긴 "나"를 설법했던 것이다.
영적인 지혜는 영원한 행복을 선사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뭔가 영속적인 정신적 그무엇이라고 할때, 이것은 외부의 상황의 극심한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마음의 기준점을 찾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준은 내가 내자신을 판단없이 바라볼때 이루어진다. 실용적 지혜는 이러한 기준에서 시작이된다.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객관성으로 내가 세상에서 더 잘살수(?)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들이면 충분하다. 이것들은 나의 자산이다. 내가 나이어야 한다. 받아들일때 이 모든 쌓아온 것에서 지혜가 분출되고 이 지혜로 성공? 혹은 행복한 삶이 창조된다.
"나"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어릴때는 부모의 간섭때문에 커서는 끊임없는 가족과 사회적 압력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으로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목표나 이상을 따르려고 내 자신을 학대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힘들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잊고 사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이 불안이 더 외부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부추기거나 그 외부의 세계의 자극에 중독시키는 역할을 하게되기도 한다. 내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외부의 세계의 기준에 의해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사실상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이 변화는 실패할 수 없는 운명이고 내 안에서의 심리적 불안과 뒤틀림만을 야기하게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은 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다. 내 한계는 수많은 컴플랙스로 이루어져있고 이 컴플랙스를 알게 하는 것은 외부세계와의 마찰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나의 원수는 나의 스승인 것이다. 이 한계를 정확히 직시할때 쓸데없는 내 자신을 변하려하는 노력은 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는 노력의 상당부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인격적이 변화이다. 왜냐하면 어렸을때부터 우리의 심리는 상당한 부분들이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나를 그대로 본다는 것은 이 노력을 정지한다는 것이고 이 정지를 통한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비축한다는 것이다.
내가 내자신을 본다는 것은 첫째 판단중지다. 내 자신에 대한 일체의 도덕적 판단 중지다. 이때 여분의 심리적 에너지가 생긴다. 둘째 이 에너지로 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 있다. 내 자신의 한계는 컴플랙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본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번째 단계는 이 한계에 대한 직시의 강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지혜의 강도가 높아진다.
성공을 하려고 노력한다. "나"가 없는 성공은 자기 학대일뿐이다. 내가 내 자신을 발견할때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실용적 지혜가 나온다. "나"라는 것은 그동안의 쌓아온 온갖경험들의 총체이다. 아무리 내가 공자 예수 부처를 이용해 성공하려고 날뛰어도 이 모든 것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나"가 "나"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래서 유다에게 너가 하고 것을 하라고 했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것이고 부처는 수많은 원인과 결과로 생긴 "나"를 설법했던 것이다.
영적인 지혜는 영원한 행복을 선사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뭔가 영속적인 정신적 그무엇이라고 할때, 이것은 외부의 상황의 극심한 변화에도 요동하지 않는 마음의 기준점을 찾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기준은 내가 내자신을 판단없이 바라볼때 이루어진다. 실용적 지혜는 이러한 기준에서 시작이된다.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객관성으로 내가 세상에서 더 잘살수(?)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것들이면 충분하다. 이것들은 나의 자산이다. 내가 나이어야 한다. 받아들일때 이 모든 쌓아온 것에서 지혜가 분출되고 이 지혜로 성공? 혹은 행복한 삶이 창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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