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12의 게시물 표시

진중권과 인터넷 글쓰기

진정한 토론을 위하여 토론이 정말 이성을 위주로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와 다른 의견에 철저히 개방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문제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나"라는 에고를 어떻게 극복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맞다. 트위터는 단문이기에 감정적이고 격할 수가 있다. 감정적인 "나"라는 에고가 강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라 "나"를 극복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사심없이 듣는 이성적인 토론을 깊게 할 수 있는 공간은 결코 못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진중권이 시사자키 정관용과의 인터뷰(팟캐스트로 다운가능)에서 그가 주장한 것은 인터넷시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했지만 트윗터 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과 리트머스라는 인터넷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나온 그가 한 말중 또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이렇게 인터넷상에서 디스커션을 해보면 사실상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는 것이다. 토론을 하면 할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제한된 세계가 드러나고 이 제한된 세계를 인정하고 부수고 새로운 의견이 도출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는 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인 심리적 기제 나도 한 때 깊이있는 지적인 토론에 대한 예찬자였다. 화려한 지적인 추상적인 문구들, 뛰어난 석학들의 말의 인용 가운데 이루어지는 현란한 말들의 오고감 이것에 매료되기도 했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해 토론하는 이들을 숭배했었고 이들을 카피하기까지 했었다. 아마 지금도 이 글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이 2급 카피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이비 지식인의 원죄인가?). 사실인즉 소위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일회용적인 단문 토론보다는 계속적인 장문토론이 소위 깊이 있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인데 이러한 계속적인 토론의 과정에 있어 상대방과 나는 상처로 얼룩진다는...

신죽음의 신학

결국은 신죽음의 신학도 신화적 세계를 비신화하는 노력에서 일어나는 것같습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는 본회포의 옥중서간에서 언급된 신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소수의 저희 리버럴한 신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만 해당된다는 것같다는 느낌이 노무현의 죽음 이후 계속 듭니다. 예수가 죽은 후 그가 신화화 되었고 여전히 2000년이 지난 교회에서도 신화적 예수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예수라는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일 것입니다. 사유할 시간보다는 살기에 바쁘고 지친 이들에게는 신의 인격화 혹은 특정인간의 신격화는 이들의 심리적 행복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 비신화 작업은 혹은 신죽음의 신학은 이성적인간의 필연적 사유의 결과였지만 대다수의 종교적 민중들에게는 거리가 먼 사유였고 그래서 신학과 신앙의 분리가 현대사회에 일어난 것같습니다. 이틈을 타 배타적 신학이나 도피적 신앙 혹은 성공주의적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같습니다. 리버럴한 신학은 교회밖에 있는 사회운동가들의 사회개을 위한 혹은 리버럴한 사상가들의 이론적 유희를 추구를 위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결과도 초래한 것같습니다. 좀 약간 자아 비판적으로 본다면 저희같은 리버럴한 신학을 공부한 이들이 민중들의 심리적 상황을 이해못한 결과가 신학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그래도 약간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마 이 신학을 접한 남미 운동가들이 복잡한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고 순수한 추정입니다). 그리스신화에는 큐피드와 아폴론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칼융에 의하면 큐피드는 인간의 감성을 상징한다면 아폴론은 이성을 상징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칼융은 이러한 신화적 분석을 통해 이성이라는 것도 사실상 신화의 한부...

모순 그리고 십자가

인간 존재 자체가 모순이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기보다는 문명을 만들과 과학을 만들고 자연을 파괴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닌가?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인데 말이다. 인간에게 있어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자체도 모순이고. 십자가의 의미가 죽음의 의미인데 부활의 의미도 된다는 것도 모순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그 존재를 부인할 때, 진리는 드러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마1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