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죽음의 신학
결국은 신죽음의 신학도 신화적 세계를 비신화하는 노력에서 일어나는 것같습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는 본회포의 옥중서간에서 언급된 신없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소수의 저희 리버럴한 신학을 공부한 이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같다는 느낌이 노무현의 죽음 이후 계속 듭니다. 예수가 죽은 후 그가 신화화 되었고 여전히 2000년이 지난 교회에서도 신화적 예수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예수라는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을 위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든 사실일 것입니다. 사유할 시간보다는 살기에 바쁘고 지친 이들에게는 신의 인격화 혹은 특정인간의 신격화는 이들의 심리적 행복을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 비신화 작업은 혹은 신죽음의 신학은 이성적인간의 필연적 사유의 결과였지만 대다수의 종교적 민중들에게는 거리가 먼 사유였고 그래서 신학과 신앙의 분리가 현대사회에 일어난 것같습니다. 이틈을 타 배타적 신학이나 도피적 신앙 혹은 성공주의적 신학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같습니다. 리버럴한 신학은 교회밖에 있는 사회운동가들의 사회개을 위한 혹은 리버럴한 사상가들의 이론적 유희를 추구를 위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결과도 초래한 것같습니다. 좀 약간 자아 비판적으로 본다면 저희같은 리버럴한 신학을 공부한 이들이 민중들의 심리적 상황을 이해못한 결과가 신학과 신앙의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해방신학이 남미에서 그래도 약간은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마 이 신학을 접한 남미 운동가들이 복잡한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물론 역사적 근거는 전혀 없고 순수한 추정입니다).
그리스신화에는 큐피드와 아폴론이라는 존재가 등장합니다. 칼융에 의하면 큐피드는 인간의 감성을 상징한다면 아폴론은 이성을 상징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칼융은 이러한 신화적 분석을 통해 이성이라는 것도 사실상 신화의 한부분이다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록 신학에서 이성의 사용으로 기독교를 비신화화하려 노력을 했으나 만약 칼융의 주장데로 이성이 신화의 그저 한부분일 뿐이라고 하면 이성의 이러한 종교의 비신화의 노력은 불가능한 노력인 것같습니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떠오르네요.
글을 마치겠습니다. 노무현의 죽음으로 다시 신화의 세계에 빠져있는 내 자신을 보며 칼 융이 맞구나, 신화속에서 울고 웃고 있는 민중이 맞구나, 문제는 소위 지식을 탐미하던 내가 문제였구나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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