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찰나를 살지만 동시에 영원을 사는 것이다. 수백만년 수십억광년에 비하면 우리의 인생은 찰나이지만 우리의 영적인 노정은 우리가 태어나기전에 이미 우주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고 이 노정은 영원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빠른 것도 아니고 늦은 것도 아니다. 시간은 영원한 것이다.
진정한 토론을 위하여 토론이 정말 이성을 위주로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나와 다른 의견에 철저히 개방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핵심적인 문제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나"라는 에고를 어떻게 극복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 맞다. 트위터는 단문이기에 감정적이고 격할 수가 있다. 감정적인 "나"라는 에고가 강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라 "나"를 극복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사심없이 듣는 이성적인 토론을 깊게 할 수 있는 공간은 결코 못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진중권이 시사자키 정관용과의 인터뷰(팟캐스트로 다운가능)에서 그가 주장한 것은 인터넷시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했지만 트윗터 시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했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과 리트머스라는 인터넷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터뷰에 나온 그가 한 말중 또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이렇게 인터넷상에서 디스커션을 해보면 사실상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된다는 것이다. 토론을 하면 할수록 자신과 상대방의 제한된 세계가 드러나고 이 제한된 세계를 인정하고 부수고 새로운 의견이 도출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는 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인 심리적 기제 나도 한 때 깊이있는 지적인 토론에 대한 예찬자였다. 화려한 지적인 추상적인 문구들, 뛰어난 석학들의 말의 인용 가운데 이루어지는 현란한 말들의 오고감 이것에 매료되기도 했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해 토론하는 이들을 숭배했었고 이들을 카피하기까지 했었다. 아마 지금도 이 글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이 2급 카피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이비 지식인의 원죄인가?). 사실인즉 소위 지식인들의 세계에서는 일회용적인 단문 토론보다는 계속적인 장문토론이 소위 깊이 있고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인데 이러한 계속적인 토론의 과정에 있어 상대방과 나는 상처로 얼룩진다는...
한국 사람들의 환상중에 하나가 영어실력을 늘기 위해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고 영어로 생각하는 연습해야한다는 것인데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이것은 미국사람과 오랜생활을 통해 기초적인 언어부분이 머리속에 잡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지 대부분의 한국사람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모국어로 적어도 6학년까지 발전시키지 못하면 배우자고자 하는 외국어도 힘들다는 리서치가 있다. 한국에서의 영어공부는 회화도 그렇고 독해도 그렇고 영어의 한국어로의 번역과정이 필수적이어야 된다. 심지어 미국학교 조차도 학생의 모국어를 이용해 영어공부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 방법이 매우 효과적이라고 교육학자들 사이에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즉, 학생이 모국어로 가지고있는 기존의 지식과 그 지식과 관련된 영어지식을 대응시키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I have an apple이란 단어와 "나", "가지고있다", "사과"라는 지식을 대응시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내가 유럽식 사회주의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영어로된 원서, socialism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계속 심도깊게 하면 머리에 두개의 언어 집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이 집들이 서로 오고가며 도와주는 현상이 생긴다. 그래서 심지어 어른들이 더 빨리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연구 결과는 아이들이 외국에서 그 외국어를 빨리 배우는 것은 그들이 학교안에서 생존해야 되기때문이지 언어적 뇌의 차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보통 한국에서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아주 어릴때는 파닉스와 회화를 배우고 좀 신경쓰면 이야기책 읽히고 그러다가 초등 고학년때 문법및 중등 독해 선행을 한다. 이렇게 하는데도 아이들이 미국인 앞에 떨려 입이 막히고, 조금만 복잡한 문장을 보이면 이에 대한 이해가 바닥이라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현상이다. 정말 잘못하는 것은 초등 고학년때 시작하는 문법공부인데...
인류의 역사를 통해 문명이 시작된 것은 인간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이다. 거기서부터 내세, 해탈, 구원, 전생 등의 관념이 생겨났다. 이집트문명에서 또한 가부좌를수메르문명보다 앞서고 있다는 홍산문명에서 가부좌를 한 여신상의 발견 또한 동북아시아의 문명의 근원 또한 이러한 정신적 각성이 아닌가 추정된다. 서양 사상의 시초는 소크라테스이고 그는 "너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자신에 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 삼았다. 한편 동양사상의 문을 연 가장 중요한 인물중의 하나인 부처는 모든 것이 "나의 마음"에서 부터 나온다는 사상을 열었다. "나"를 바꾸기 위해 우리는 노력한다. 어릴때는 부모의 간섭때문에 커서는 끊임없는 가족과 사회적 압력때문이다. 이러한 압력으로 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목표나 이상을 따르려고 내 자신을 학대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심리적으로 힘들수밖에 없다.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잊고 사니 우리는 근본적으로 불안하다. 이 불안이 더 외부의 세계에 몰입하도록 부추기거나 그 외부의 세계의 자극에 중독시키는 역할을 하게되기도 한다. 내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외부의 세계의 기준에 의해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사실상 내가 내 자신을 모르니 이 변화는 실패할 수 없는 운명이고 내 안에서의 심리적 불안과 뒤틀림만을 야기하게 된다.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은 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다. 내 한계는 수많은 컴플랙스로 이루어져있고 이 컴플랙스를 알게 하는 것은 외부세계와의 마찰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나의 원수는 나의 스승인 것이다. 이 한계를 정확히 직시할때 쓸데없는 내 자신을 변하려하는 노력은 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하는 노력의 상당부분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인격적이 변화이다. 왜냐하면 어렸을때부터 우리의 심리는 상당한 부분들이 옳고 그름의 도덕적 기준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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