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언어와 정신세계

"We are not analyzing a phenomenon (e.g. thought) but a concept (e.g. that of thinking), and therefore the use of a word. So it may look as if what we were doing were Nominalism. Nominalists make the mistake of interpreting all words as names, and so of not really describing their use, but only, so to speak, giving a paper draft on such a description." 우리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을 분석하고 있으니 결국 말의 사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것이 유명론인 것처럼 보인다. 유명론자들이 모든 단어들이 이름뿐이라고 해석하는 실수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어들의 사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와같은 표현에 대한 초안만을 주는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실체가 있고 실체를 이루고 있는 현상이 있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현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라고 하였는데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 언어의 사용이 사실상 언어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상세계를 중요시 여기고 이 세계에서 어떻게 언어가 사용되는가에 집중한다. 그러나 그는 "사용"과 "현상" 그리고 그 현상을 가능케하는 실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언어로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실체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된다는 말로 초기 비트겐슈타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자체의 사용이 현상 그리고 실체와 분리될 수 없다면 그의 주장은 틀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발달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언어의 발달은 사실상 관계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는 무엇을 원한다. 그 사이에는 제 삼자(엄마)가 있고 그것을 통...

존재의 변화

1. 나의 변화는 결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로 존재될 때 시작된다. 박약한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내자신을 변명하고 합리화시켜 솔직해지지 못하는 것이 내 행동을 막는 것이다. 인생의 원칙은 스스로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할 때 세워지고 이 원칙으로 생각이 나오고 바로 이것이 의지이다. 원칙은 상대적인것을 넘어 절대적인 것에 가깝다. 그러나 이 한계에 대한 인식은 상대방과 비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교하자마자 이것은 선입견으로 작용하기 때문. 우선적으로 버려야 될 선입견은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이 아니라 내자신에 대한 선입견이다.  2. 현대 심리학이 발견한 것중의 하나가 무의식이고 무의식이 의식차원에서 드러날때 치유든 무언엇이든 일어난 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의식이 드러나자마자 지식으로 끝임없이 합리화하는 작용이 시작된다는 것. 물론 무의식도 언어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언어가 가리키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것이 정신분 석학의 한계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다. 차라리 “모른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Here and Now에 몰입하는 것이 우리의 건강한 사고와 마음을 가져오는 쎄라피가 아니가 생각든다. 현재 유행하는 명상이 여기에 촛점되어져 있다. 3. 문제해결이 “여기 지금”에 몰입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주장의 문제점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로부터 도피로 이것을 이용하는 데 있다. 그래서 일단은 현재에 머무르며 에너지를 충만하게 하고 그다음 이 에너지로 다시 근본적인 문제를 살필 수 있다. 이것이 홍익학당의 명상법의 핵심이다. 그러나 문제를 살피는 사람은 끝임없이 자신의 문제를 그대로 보고 합리적 해결방안을 내놓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이 문제를 합리화를 여전히 하는 경향이 있다. 4. 기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기 싫어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를 더해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심리가 존재한다. 명상이란 이 겹겹이 쌓여있는 포장을 걷어내는 것이다. 이 걷어내는 작용은 저절로 되는데 우리...

순응성과 창조성 크리슈나무리티 교육 - 1

Conventional education makes independent thinking extremely difficult. Conformity leads to mediocrity. To be different from the group or to resist environment is not easy and is often risky as long as we worship success. The urge to be successful, which is the pursuit of reward whether in the material or in the so-called spiritual sphere, the search for inward or outward security, the desire for comfort - this whole process smothers discontent, puts an end to spontaneity and breeds fear; and fear blocks the intelligent understanding of life. With increasing age, dullness of mind and heart sets in. 전통적인 교육은 독립적인 생각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순응성은 평범성으로 인도한다. 단체와 다르다는 것 혹은 환경에 저항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공을 숭배하는 한 쉽지가 않고 종종 위험하다. 성공하려는 욕구 -물질적인 혹은 이른바 영적 영역에서 있어서 보상을 추구하는 것, 내적 혹은 외적 안정성에 대한 추구 - 이 모든 과정은 불만감을 질식시키며  자발성을 끝장내며 두려움을 생산한다. 그리고 두려움은 인생에 대한 지적인 이해를 막아버린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과 마음의  무뎌짐이 시작된다. 주해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인 교육은 사실상 교육이 아니다. 교육의 이상은 인간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새롭게 고치고 진보시키는 인간을 길러내는 과정이라고 할 ...

명상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 에서)

Meditation 명상 (크리슈나무르티) MEDITATION IS NOT the mere experiencing of something beyond everyday thought and feeling nor is it the pursuit of visions and delights. An immature and squalid little mind can and does have visions of expanding consciousness, and experiences which it recognizes according to its own conditioning. 명상이란 매일의 생각과 감정을 넘어선 그 무엇을 단지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보이는 것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 미성숙하고 더러운 작은 마음으로 의식의 확장의 나타남과, 그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인식하는 경험을 갖을 수 있다. 주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명상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신비로운 정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것을 말하기 쉽다. 명상을 통해 정적인 세계에 진입해 어떠한 환상적인 것을 보려하고 소위 이분법을 넘어선 경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명상에서 보이는 것은 이미 우리 마음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의 현현일 뿐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자 하는 것도 사실상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알고 있는 것이 어떠한 조건에 따라 드러나고 그것을 인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경험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깨달음을 결코 알수없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 모순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것만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명상에 있어서 초월적인 것이라는 것을 경험할지라도 이미 우리 비성숙한 그리고 천박한 두뇌에 내재 되어있는 것을 경험할 뿐이다. This immaturity may be greatly capable of making it...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제" 서론 주해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제" 서론 주요부분 해설 “...shows the power of the scheme to put the various elements of our experience into a consistent relation to each other.” [Part I]은 우리 경험의 여러 구성요소들이 서로 일관된 관계성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획의 힘을 보여준다. 주해 여기서 Scheme이라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정한 철학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어떠한 커다란 스케일의 조직적인 계획을 이야기한다. 사실 철학의 목적중의 하나는 인간의 외부 내부 세계에 대한 경험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사실상 이 경험이라는 것은 무수한 종류가 있음으로 일정한 조직적인 계획이 없이는 이것을 의미있게 정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정한 목적 아래 조직적인 계획을 일단 선정하면 이에 따라 경험을 나열할 수 있고 이 경험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이것이 scheme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This whole metaphysical position is an implicit repudiation of the doctrine of 'vacuous actuality.'” 이 전체적인 형이상학적인 주장은 진공상태의 실제라는 교리에 대한 암묵적인  부정이다. 주해 블레디가 주장하는 vacuous actuality의 개념은 실제하는 것은 어떠한 외부의 관계성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화이트헤드(Whitehead)는 블레디의 이 주장을 반박하면서 어떠한 독자적인 실체를 부정하고 모든 실체의 본질은 관계성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relatedness ' is dominant over 'quality...such relatedness is wholly concerned with the appropriati...

명상의 유행과 질문의 심각성

요즘 이 명상 법이 이곳에서는 유행이다. 틱낫한, 에카르트 톨레, 켄윌버도 이 범주를 못벗어나고 있는 것같다. 이 명상법에 의하면 깨달음 혹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의식적으로 지금 이순간을 느끼면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관찰하는 것이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관찰이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이 관찰을 통해 이것이 내 존재의 느낌이고 이 존재의 느낌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더 나아가서 내가 태어나기전에도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의 추론이기보다는 직관에 가까운 깨달음이다. 한시간 전의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과 두시간 전의 내가 존재하는 느낌을 통해 변하지 않는 나를 추정하고 이 나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직관이다. 한국에서 내가 한동한 몰입했던 윤홍식(홍익학당대표)은 이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 이 느낌을 계속 혼자만 소위 추구하는 것은 소승이고 양심경영을 통해 모든 자를 깨달음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대승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소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왜 깨달음을 추구했었는가라는 것. 왜 나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가? 과연 심리적 실체로서의 "나"는 변할 수 있는가? 변할려고하는 주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변할려고 하는가? 대답과 방법은 현란하다. 그러나 질문의 심각성이 사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