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유행과 질문의 심각성

요즘 이 명상 법이 이곳에서는 유행이다. 틱낫한, 에카르트 톨레, 켄윌버도 이 범주를 못벗어나고 있는 것같다. 이 명상법에 의하면 깨달음 혹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금 의식적으로 지금 이순간을 느끼면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관찰하는 것이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을 관찰이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다. 이 관찰을 통해 이것이 내 존재의 느낌이고 이 존재의 느낌은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더 나아가서 내가 태어나기전에도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의 추론이기보다는 직관에 가까운 깨달음이다. 한시간 전의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과 두시간 전의 내가 존재하는 느낌을 통해 변하지 않는 나를 추정하고 이 나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직관이다. 한국에서 내가 한동한 몰입했던 윤홍식(홍익학당대표)은 이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한발자국 더 나아가 이 느낌을 계속 혼자만 소위 추구하는 것은 소승이고 양심경영을 통해 모든 자를 깨달음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 대승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소위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왜 깨달음을 추구했었는가라는 것. 왜 나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되려고 하는가? 과연 심리적 실체로서의 "나"는 변할 수 있는가? 변할려고하는 주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변할려고 하는가? 대답과 방법은 현란하다. 그러나 질문의 심각성이 사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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