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 에서)

Meditation
명상 (크리슈나무르티)
MEDITATION IS NOT the mere experiencing of something beyond everyday thought and feeling nor is it the pursuit of visions and delights. An immature and squalid little mind can and does have visions of expanding consciousness, and experiences which it recognizes according to its own conditioning.
명상이란 매일의 생각과 감정을 넘어선 그 무엇을 단지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보이는 것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있지 않다. 미성숙하고 더러운 작은 마음으로 의식의 확장의 나타남과, 그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인식하는 경험을 갖을 수 있다.
주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명상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통해 무언가를 신비로운 정적인 세계를 체험하는 것을 말하기 쉽다. 명상을 통해 정적인 세계에 진입해 어떠한 환상적인 것을 보려하고 소위 이분법을 넘어선 경험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 명상에서 보이는 것은 이미 우리 마음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의 현현일 뿐이다. 명상을 통해 우리가 경험하고자 하는 것도 사실상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알고 있는 것이 어떠한 조건에 따라 드러나고 그것을 인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 경험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깨달음을 결코 알수없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순간 자기 모순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는 것만 경험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우리가 명상에 있어서 초월적인 것이라는 것을 경험할지라도 이미 우리 비성숙한 그리고 천박한 두뇌에 내재 되어있는 것을 경험할 뿐이다.
This immaturity may be greatly capable of making itself successful in this world and achieving fame and notoriety. The gurus whom it follows are of the same quality and state. Meditation does not belong to such as these. It is not for the seeker, for the seeker finds what he wants, and the comfort he derives from it is the morality of his own fears.
이 미성숙함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명애와 악명을 이루는데 매우 성공적일 수 있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미성숙함과 이러한 마음으로 따르는 영적 스승도 이 미성숙과 같은 질과 상태에 있다. 명상이란 이러한 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추구하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찾기에 그리고 그가 그것을 통해 얻는 위로라는 것은 그 자신의 두려움의 도덕성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해: 우리가 숭배하는 소위 영적 스승도 이 미천한 마음과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다. 그들이 이 천박한 마음이 추구하는 것을 제공하기에 이들 또한 이 천박한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두려워한다. 두려움에 못견디어 무엇을 추구하고 소위 명상과 영적 스승이라는 것을 통해 잠정적인 위로를 받는다.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위로와 욕망의 만족이며 사실상 우리는 진리자체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명상이라는 것은 추구될 수도 없고 추구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어떠한 종교와 철학에 속한 것이 아니다.
Do what he will, the man of belief and dogma cannot enter into the realm of meditation. To meditate, freedom is necessary. It is not meditation first and freedom afterwards; freedom - the total denial of social morality and values - is the first movement of meditation. It is not a public affair where many can join in and offer prayers. It stands alone, and is always beyond the borders of social conduct. For truth is not in the things of thought or in what thought has put together and calls truth. The complete negation of this whole structure of thought is the positive of meditation.
하고자 하는 것을 하라! 믿음과 교조적인 사람은 결코 명상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 명상을 위해서는 자유가 필수적이다. 명상이 처음이고 자유가 나중이아니다. 자유 즉 사회적 도덕성과 가치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 명상의 최초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다수가 가입하고 기도를 제공하는 대중적 일이 아니다. 그것은 홀로 서 있고 항상 사회적 행위의 경계를 넘어서 있다. 진리란 생각이라는 혹은 생각이 어떠한 것을 조직해내는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의 모든 구조에 대한 완전 부정이 명상의 긍정성이다.
주해: 우리는 명상을 통해 궁극적인 자유를 체험하기를 원한다. 명상이라는 행위가 선행하고 그것을 통해 절대 자유라는 것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를 전제하지 않는 명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허상의 우상으로 종속시킬 뿐이다. 명상을 통해 자유를 얻기는 커녕 명상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명상방법에 우리는 노예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어떠한 명상의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은 생각으로 구성되고 생각은 과거의 잔재일뿐이며 이 과거의 에너지를 가지고는 영원한 현재성이라는 진리에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를 생각으로 도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을 숭배하며 이 생각으로 진리에 다가갈 명상을 하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명상은 이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는 온갖 종교적 구조에 대한 전적인 부정이고 이 부정은 자유의 상태만이 가능하다. 자유가 명상이다!

 Jidu Krishnamurti  Freedom from the 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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